문학과 심리학

백제 멸망의 심리학: 의자왕, 예식진, 그리고 백성들의 내면

interflowlab 2025. 5. 2. 18:09

백제 멸망 당시의 전쟁터와 무너진 성벽

660년, 백제는 결국 무너졌다. 수많은 전쟁과 외교, 배신과 의리, 희생과 침묵의 끝에서 무너진 왕국. 하지만 진정한 멸망은 성벽의 붕괴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졌을 때부터였다. 이 글에서는 백제 멸망 당시 주요 인물들의 심리, 그 이후 3년간 이어진 백제 부흥운동의 민심을 심리학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의자왕의 내면: 왕이었으나, 고독했던 인간

슬픔에 잠긴 백제 의자왕의 초상화

 

의자왕은 일반적으로 '패망의 군주', '쾌락에 빠진 무도한 왕'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당서, 그리고 최근 낙양에서 발견된 묘지명을 통해 드러나는 정황은, 그가 외교와 국방에 있어 오랜 시간 치열하게 고민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20년 이상 당나라와의 외교전에서 반당 노선을 고수하며 독립을 유지하려 했던 의자왕은, 결국 외로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사비성이 무너지는 날, 그는 웅진성으로 퇴각하며 예식진에게 군권을 위임한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의 마지막 선택은 자발적 항복이었을까, 아니면 포로로서의 체념이었을까? 일부 기록은 그가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고 전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의 내면이다.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왕이었지만, 동시에 그도 가족을 잃고 나라를 잃은 한 인간이었다. 이는 리더의 고독, '권력자의 책임감이 불러오는 무력감'이라는 심리적 압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예식진의 심리: 배신자인가, 생존자인가?

백제 귀족 예식진과 당나라 군사의 비밀 회담

 

예식진은 좌평 가문의 고위 귀족으로, 낙양에서 발굴된 묘지명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정3품 대장군'까지 오른 인물이다. 문제는 그가 어떻게 그런 지위까지 올랐는가다. 일부 연구자들은 예식진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에 항복한 인물로, 즉 백제를 배신한 결정적 인물로 본다.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예식진은 전형적인 생존 본능에 따라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왕국이 무너지는 극한 상황에서 그는 '도덕적 판단'보다 '현실적 선택'을 택했을 것이다. 이는 '인지부조화 이론'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가 왕과 조국을 배신하는 동시에, 자신이 여전히 '국익에 복무한다'는 신념을 유지하려면, 정당화를 통한 심리적 안정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에서 높은 지위를 부여받고, 그에 합당한 공적을 기록하게 되면서 그는 새로운 정체성 속에 스스로를 재구성했을지도 모른다. 역사 속 배신자는 실제론 가장 인간적인 생존자일 수 있다.

백성들의 마음: 부흥운동이라는 집단 트라우마의 발현

백제 부흥군 유민들의 숲속 은신 장면

 

백제는 멸망했지만, 백성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660년 멸망 이후, 663년까지 약 3년간 백제 부흥운동이 이어졌다. 흑치상지, 복신, 도침 등 백제 유민들이 각지에서 거병하였고, 왜(일본)으로부터도 군사를 지원받아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 과정은 집단적 트라우마에 대한 저항이자, 공동체적 정체성을 되살리는 심리적 운동이기도 했다. 심리학자 얀 오프스탈에 따르면, 공동체가 갑작스러운 상실을 겪으면 '기억의 응집'과 '행동의 보상'이라는 두 반응이 나타난다. 백제 유민의 부흥운동은 바로 이 두 반응을 보여주는 실례다.

백성들은 나라를 빼앗긴 죄책감, 지도층의 배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 속에 싸웠다. 하지만 결국 부흥운동도 실패하고 만다. 이 실패는 공동체 정체성의 2차 붕괴를 낳고, 이후 백제 유민들은 신라에 흡수되거나, 일본으로 이주하게 된다.

백제 의자왕이 백마강에서 마지막을 바라보는 장면

 

결론: 기억은 심리다

백제 멸망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단지 고대의 전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벌어진 심리적 전쟁이었다. 왕의 외로움, 귀족의 배신, 백성의 분노와 상실은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되풀이되는 인간 심리의 단면이다.

그리고 13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날의 해질녘을 다시 떠올리며 한 왕의 억울함을 위로하고, 침묵 속에 묻힌 이름들을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기억은 곧 정체성이고, 정체성은 심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 함께 듣는 역사,
〈마지막 백제의 노래〉 — 의자왕의 억울함과 백성들의 슬픔, 그리고 1300여 년을 넘은 부흥의 염원을 담은 노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