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침묵하고, 인간은 해석한다 — 종교에 대한 비판적 시선
예수와 붓다는 혁명가였고, 종교는 때때로 그들을 배신했다
1. 종교는 어떻게 왜곡되는가: 말, 해석, 그리고 권력
인류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신을 찾고, 신의 뜻을 해석해 왔다.
하지만 ‘신의 뜻’이 과연 그 자체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인간의 해석을 덧입은 구조물일 뿐일까?
불교와 기독교 모두에서 우리는 비슷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붓다는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마가디어(당시 일반 민중의 언어)**로 설법했고,
예수 역시 아람어로 사람들과 대화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의 가르침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 지난 후 문자로 기록되었고,
또 그 후엔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퍼졌다.
이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바로 의미의 이탈과 권력의 개입, 번역과 해석의 갈라짐이다.
‘사랑하라’는 명령이 ‘복종하라’로,
‘내면을 바라보라’는 말이 ‘교리에 따라야 한다’로 바뀌는 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2. 붓다와 예수는 종교인이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붓다와 예수는 사실 ‘종교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모순과 불합리, 억압된 사람들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한 사유자였고,
기득권 질서에 균열을 내는 혁명가였다.
- 붓다는 카스트 제도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 예수는 성전과 종교 권력, 그리고 로마 제국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조직은
아이러니하게도 기득권이 되었고,
그들을 따랐던 초기의 급진성과 통찰은
교리와 제도로 정제되며 사라졌다.
신은 사라졌고, 문서만 남았다.
3. 유일신 신앙과 인간 본성의 어두운 그림자
많은 종교, 특히 유일신 신앙은 배타적 진리 구조를 띤다.
“오직 이 길만이 진리다”라는 주장은
곧 타자를 부정하고, 이단을 낳으며, 갈등과 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 십자군 전쟁, 이단 심문, 마녀사냥, 동성애 박해,
- 인도의 종교 갈등, 중동 분쟁,
- 현대 사회에서의 종교적 차별과 혐오…
이 모든 건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그 신은 정말로 그렇게 말했을까?
아니, 그 신이 정말 존재했을까?
침묵하는 신 앞에서 목소리를 낸 것은 언제나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때때로 위선, 가식, 증오, 권력욕의 색을 띠었다.
4. 인간은 왜 여전히 종교를 갈망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종교를 버리지 못한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고, 혼돈 속에서 질서를 갈망하며,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고, 듣고 있다는 상상을 통해 고독을 견딘다.
이건 나약함일까?
어쩌면 그것은 인간 정신의 위대한 생존 전략일 수도 있다.
우주의 침묵 속에서, 인간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그 이야기에 눈물도, 용기도, 삶의 이유도 담는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야기가 절대화될 때 발생한다.
신을 ‘진리’로 선언하고,
그 진리를 남에게 강요할 때,
종교는 구원이 아닌 도구가 되고,
그 도구는 칼이 되어 돌아온다.
5. 우리는 믿지 않아도 괜찮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믿지 않아도 괜찮다.
타인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아도 괜찮다.
도덕은 종교 없이도 가능하고,
연대는 교리 없이도 가능하며,
삶의 의미는 신 없이도 생성된다.
진리는 교단에 있지 않고,
고요한 사유와 타인에 대한 연민 속에서
조용히 자라난다.
붓다와 예수, 그들이 진짜로 바란 것도
아마 그리 거창한 교리가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
그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마무리: 종교 이후의 시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신은 침묵했고, 인간은 해석했다.
그 해석은 때로 우리를 위로했고,
때로 서로를 찔렀다.
이제 우리는 묻는다.
이제 종교 이후의 시대는 가능한가?
신 없는 구원은 가능한가?
답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구원을 찾아 나설 수 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선
더 이상 신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